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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1937년생과 이야기하기

보노정 2009. 10. 12. 22:38

도서관 멀티미디어실에서 한참 자료를 찾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봐요, 이거 어떻게 하는 겁니까?'  돌아보니 머리가 백발인 할머니 한 분이 굽은 허리에 손을 대고서 내 옆자리 PC에서 뭔가를 하려고 하시는 중이었다. 놀라웠다.  

예약 PC에서 자리를 예약하고 해당 자리에 앉아 ID와 PW를 입력해야 사용이 가능한 이 멀티미디어실에, 그것도 ID를 만들기 위해 도서관에 회원가입을 해야 하는 간단치가 않은 과정을 다 거쳐서, 연로하신 할머니가 무슨 일로 멀티미디어실에 오셔서 옆 자리의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는 걸까?

할머니는 PC를 사용하기 위해 예약을 하는 방법에서부터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르느와르의 '바느질하는 여인' 그림을 찾아달라고도 했고,'풍경화', '유화 그리는 법' 등을 찾아서 출력해달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보시고 내용물을 고르셔야 해요' 라고 말씀드려도 막무가내.  그냥 빨리 출력해달라고 하시는 것이다. 

대체 이 할머니는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서부터 모르시는 걸까.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아마도 구청에서 하는 어르신 IT교육을 통해 컴퓨터 사용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배우신 듯 한 이 할머니가 1937년을 주민번호로 입력했을 때 내심 '어헛!'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보다 두 살이나 많으시다니...심지어 할머니는 도서관에서 판매하는, 보통 천원부터 5천원까지 금액이 들어있는 복사카드까지 갖고계셨다!
그러나, 그러니까 기본적인 컴퓨터 활용법은 알지만 검색을 어떻게 하는지, 도서관 멀티미디어실은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 할머니는 '풍경화를 그리고 싶다'는 목적 하나를 가지고 상당히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내 옆 자리에 앉으신 것이다. 

사실, 미디어실에 있던 그 누구도 젊은 날의 고생이 묻어나는 허리 굽은 백발의 할머니가 시장가는 옷차림으로 용도가 불분명한 작은 소쿠리와 외출하는 어르신들 집 잃어버리지 마시라고 자잘한 메모나 잔돈을 넣어드리는 납작한 옆으로 매는 가방을 들고 멀티미디어실에 들어섰을 때, 그 분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러나 할머니는 셈도 밝으셨고 젊은 사람에 대해서도 예의를 충분히 갖추었으며 미디어실을 관리하는 젊은 직원이 '그냥 대충 빨리 처리해야지' 하는 듯한 태도였을 때 그의 '대충'에 대해 우회적인 서운함을 목소리 톤으로 표현함으로써 '나이드신 분들에게 이렇게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한 마디로 '모든 걸 다 알고' 계셨다.  

할머니를 도와드리는데 그리 많은 시간을 쓰지는 않았지만 내 예약시간을 다 소진한 나는 풍경화를 찾고 있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웬지 이상하게 미련이 남아서 다시 미디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었는지 할머니는 그냥 앉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지나친 친절은 오버가 아닐까 하는 소심한 생각에 좀 더 지켜보던 나는, 할머니가 결국 아무에게도 도와달라 하지 못하고 그저 우두커니 움직이지 않는 화면만 보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다시 들어가 옆에 앉았다.
'할머니, 뭘 더 찾으시는데요?'  '풍경화.  내가 어떤 그림을 봤는데, 단풍이 어우러 진 숲속에 작은 집이 있고 거기에 어린 아이가 엄마하고 식탁을 차리고 있는 그런 모습. 그런 예쁜 그림을 찾어요'
이렇게 시작된 풍경화 검색은 20분 정도 이어졌고, 나도 비록 컴퓨터 화면이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름 할머니가 마우스 사용과 검색 과정에 익숙해지신 것 같아서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흑백이 아니라 컬러로 풍경화를 출력하고 싶다는 할머니의 바람을 들어드리지는 못해 못내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도 얼마전부터 아크릴화를 배우면서 5개 정도 소품을 그려봤기 때문에, 무언가 마음에 일어나는 감동을 그림으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되어서 그랬을 것 같다. 
1시간 후에 그 할머니를 식당에서 또 봤는데, 결국 별 말은 붙이지 못했다. 
교회다니시나요? 하고 물어볼걸 그랬나?

나이듦과 선입견.  몸은 시간과 함께 가지만 마음은 어린 아이 때의 호기심과 달라질 것이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누군가가 세상의 시간과 이별할 날이 멀지 않은 상황에서 혹여라도 구원받지 못했을 때, 그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미적거리면서 놓친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  몇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또 끄적여 본다.

덕분에 르느와르의 '바느질하는 마리테레즈'를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나마 다시 감상하게 된 건 1937년생 할머니와 나눈 짧은 시간이 준 작은 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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